다른 길로 새기
자주 한눈을 팔고, 자주 다른 길로 샌다. 자주 저게 왜 여기 있지? 왜 이런 것들이 마음에 드는 거지? 하고 생각한다. 이 코너는 아마도 그런 것들을 말하게 될 것 같다…….
이 코너를 쓰기로 했을 때, 존 커새버티즈의 영화 「그림자들」의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어떤 남자가 화면에 보이지 않는 건너편의 상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다. 남자의 옆, 비켜선 의자에는 잠들어 있는 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초점 밖으로 흐리게 처리되어 있다. 끝없이 무언가 말들이 오가는 때, 잠든 여자의 목걸이가 어느 순간 빛을 받아 화면 전체를 가르며 반짝인다.
존 커새버티즈, 「그림자들」 포스터 캡션*
그 빛은 고정되지 않은 카메라와 배우의 미세한 움직임 때문에 발생한 것일 테다. 빛의 순간은 짧다. 그러나 빛이 한 번 가르고 간 장면은 어쩐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멀리 모퉁이에서 등장한 개가, 한 중학생이 신고 있는 반짝이는 옥스포드화가, 반사된 유리창에 비친 진실된 구름들이 우리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빛이 가르고 간 이후의 장면은 변화하지 않았음에도 이전과는 먼 것으로 보인다.
제임스 우드는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한 장 「세부 사항Detail」 에서 중세 신학자 던스 스코터스가 개별화의 형식에 〈이것다움〉이라는 이름을 붙였음을 인용한다. 우드가 이 책에서 말하는 〈이것다움〉은 추상적 대상을 자기 쪽으로 끌어와 그것의 추상성을 가촉성으로 〈훅 불어 없애는〉 세부 사항이다. 우드는 즉, 구체화를 통해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디테일을 〈이것다움〉이라고 불렀다.
목걸이의 반사된 빛과 같이, 나는 갑작스럽게 돌출되어 이편으로 들어오는 사물들이 주는 부드러운 충격에 늘 매혹된다. 두드러진 사물이 이해와 해석의 그물을 빠져나가, 어떤 상위의 질서나 체계, 의미와 관계없이 있는 것으로 보일 때……. 사물의 〈이것다움〉이 존재하는 자리가 있다고 느껴진다. 이런 자리들은 좋고 중요하고 자꾸 보고 싶은 것이다. 사물에 〈이것다움〉을 부여하며 부피감을 주는 장면들은, 바로 그 사물들이 너무 〈있기〉 때문에 내가 서 있는 여기 지금도 이상한 방식으로 배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계가 너무 〈있고〉, 동시에 〈있는〉 것이 이상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처럼 삶의 부피감은 종종 작은 사물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두 번째 장면은 미야자키 나츠지케이의 『당신은 분짱의 사랑』에 나오는 그림이다.
미야자키 나츠지케이, 『당신은 분짱의 사랑』 표지 캡션*
이 만화의 한 장면에서 공격적으로 다가오는 어떤 인물의 흔들리는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가 입은 티셔츠의 무늬는 더 충격적으로 이상하고 웃기다. 일이 벌어진 칸 안에서 이 두 가지는 같은 무게로 그려져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일은 얼굴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너무 이상한 티셔츠의 무늬 때문에 자꾸 한눈을 팔게 되는 나머지 그 장면이 웃겨지고 만다. 그러면 일은 얼굴에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냐, 얼굴만큼 중요한 다른 장면이 바로 같이 진행되고 있어, 그런데 그건 이런 것들이지, 바로 이런 말도 안 되는 티셔츠의 무늬 같은 것들 말이야, 하고 말하는 것 같다. 자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다른 길로 새게 만든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건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일이다.
이런 장치들은 〈이것다움〉을 만든다. 동시에 이것만이 아닌 다른 것을 보게 하는 장면이다. 이것이 너무 이것다운 나머지, 지금 있는 여기를 이상하게 만들고, 동시에 이것만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것에 마음을 쏟게 된다. 그러니까 자꾸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세 번째 장면을 기워 보자. 또 다른 길로 새는 완벽한 공간 중 하나는 만화의 칸이다. 만화의 칸, 또는 칸 밖의 칸에서 어떤 작가들은 커다랗고 촘촘하게 몽블랑 같은 것을 그려 놓고 〈먹고 싶다〉고 쓴다. 그 몽블랑은 등장인물 중 누군가가 먹고 싶어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닐 수도 있다. 이처럼 때로는 만나서는 안 될 것들이 나란히 같이 있다. 만화의 칸에는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너무도 바보처럼 작거나 너무도 터무니없이 크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 뻔뻔함을 무척 좋아한다. 거기서는 말이 되거나 말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 나타난 음식들, 호화롭고 이름도 처음 들어 보는 케이크들을, 괜히 비슷한 것들을 찾아서 먹고는 했다. 게임에서 퀘스트를 받은 것처럼.
이런 장면으로 접어들어 가면 무수히 다른 길로 새게 된다. 그곳에서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다. 이런 장면들 위로는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 다른 이야기 하자, 집요하고 부드럽게 묻는 케이크들이, 갑자기 밀려들어 오는 티셔츠의 무늬가, 목걸이의 빛이, 친구들의 얼굴들이 겹쳐진다. 그러면 나는 마치 장면들이 얇은 포처럼 느껴지고, 종이접기를 하는 것처럼 세계를 접었다 펼쳐서 얇게 들러붙은 장면에 다른 방식으로 기입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언젠가 다음과 같은 것들을 궁금해하는 사람을 쓴 적이 있다.
이따금 스카프에 새겨진 그림들을 오래 바라보고 어떤 유실된 연관성들을 상상하게 된다. 스카프의 무늬들은 어떤 방식으로 결정되는 걸까? 나의 스카프에는 금고리에 감겨 회전하는 동물들이 그려져 있다.
영원히 이런 것을 궁금해하는 어떤 사람을 그려 두고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 채로 다시 돌아왔다. 평평한 면을 가르는 빛들, 금고리에 감겨 회전하는 동물들, 다른 길로 새게 하는 얇은 면포와 같은 장면들은 내 위로 덮이고 내 안으로 접혀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얼굴로, 다른 이야기 하자, 다른 이야기 하자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길로 계속 새는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이제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 다른 이야기 하자……. 다음 회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