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갈아입기와 종이 한 페이지 먹기 연습
옷을 계속 갈아입는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말하니까(왜냐하면 나는 계속 옷을 갈아입는 사람이었다) 친구는 그럼 옷을 갈아입고 산책하는 이야기를 쓰라고 했다. 산책을 하다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데 다 마시고 이거 디카페인이냐고 물어보니 아니라는 대답을 듣는 이야기를 쓰라고 했다. 그렇다면 잠이 오지 않는 그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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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김유림의 시는 ~할 거야, 거야거야로 이루어진 시였는데 무엇무엇을 할 것이라고 계획을 할 것이라고 해서 시 제목도 계획시집을 쓸 거야였다. 약속도 미래도 분명하지 않은 세계, 어떤 의지로만 이루어진 태도가 열어 놓는 공간에서 무엇이 그려지다가도 모호해지는 슬픔을 아는 사람이 쓴 글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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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 비겁함과 슬픔을 빌려와서 말해 보자. 옷을 계속 갈아입는 글을 쓰면서, 동시에 무엇을 할 것이라고만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마신 커피가 알고보니 디카페인이 아니어서 잠이 오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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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옷들을, 옷들을 갈아입으며 무언가를 반영하거나 어딘가에 귀속된다고 착각하기를 반복했다. 지금도 새로 도착한 옷을 입고 이 글을 쓴다. 언제나 새로 도착한 옷을 입고 글을 쓰기......그러니까 문장 단위로 세계를 조율하는 일. 무수히 분열하고 무수히 봉합하기. 접속사를 바꾸면서 글을 썼다 지웠다. 그러나, 그래서....... 계속 바꾸었다. 문장을 한순간은 진실로 믿고 진실로 부정하기를 반복하기의 과정으로 쓰여진 글, 그리고 인용구들을 무한하게 이은 한 권의 책을 떠올린다. 혹은 한 벌의 자켓을. 그래서 그 자켓은 나에게 어울릴까? 그러나 어떻게 흐르는 창의 빛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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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을 자면서 생각했다. 옷을 입기에도 당연히 연습이 필요하다. 소재, 두께, 색감, 형태, 조화, 형식, 구조, 시간, 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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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기. 보폭만큼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눈앞에 도래한 것 이외의 시간들은 신기할 만큼 빠르게 지워진다. 이건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진데, 그래서 통합적인 책의 인상을 알 수 없어진다. 불타버린 지도. 나는 코트를 입고 있다. 매순간 새로 정립되는 것처럼 착각되는 인식 가운데 공통적인 연결은 무엇일까? 울, 실크, 모헤어 소재가 섞인 여러 가지 색의 실이 엮여 있는 이탈리아산 패브릭으로 만들어진 코트를 본다. 길을 걷다가도 옷 소재 성분들을 읊거나, 원단의 짜임새나 실들의 색을 바라본다. 시간을 중첩시키는 일, 수직과 수평으로 직조해내는 일, 소매를 따라가다가 그 끝에 메뉴판이 있고 커피를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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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 위에 얹어진 스카프에 대해 써보자. 이따금 스카프에 새겨진 그림들을 오래 바라보고 어떤 유실된 연관성들을 상상하게 된다. 스카프의 무늬들은 어떤 방식으로 결정되는 걸까? 나의 스카프에는 금고리에 감겨 회전하는 동물들이 그려져있다. 그걸 보며 떠오른 것은 <통과비자> 속 게오르그의 말이었다. "선생님, 여기가 이미 지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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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한 페이지를 통째로 먹는 법
1. 증류된 물 한 컵과 그 페이지를 준비한다.
2. 한 손에는 물컵을, 다른 손에는 종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3. 그 다른 손으로 친한 친구들과 이별하라. 그리고 원한다면, 이 세계와도 이별하라.
기예르모 카브레라 인판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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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글은 잠을 자며 끝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잠을 잘 자는 것이 좋으므로, 그럼 이제 지금까지 쓴 페이지를 먹고 잠드는 연습을 해보자. 이제 내 손에는 새로 봉제된 옷 한 벌이 놓여 있다. 가볍고 부드럽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며 떠오르는 미소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