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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와 바람

언젠가 번역가 박세형 선생님이 레몽 크노의 『1백조의 시Cent mille milliards de poèmes』(1961)를 소개해 준 적이 있다. 레몽 크노가 자신이 속한 문학 연구 집단 울리포의 실험 차원에서 만든 이 작품은 열 편의 시로 1백조 개의 시를 만들 수 있는 시집이다. 지면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모양새를 한 이 책은 소개에 따르면 모든 조합을 다 읽는 데 2백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토록 긴 시간이나 우연하게 배치될 1백조 개의 시 조합보다도 다만 책의 형태가 눈에 띄었다. 이렇게 가볍게 팔락이는 가느다란 줄기와 같은 지면들. 이 책을 보고 있으면 겹겹의 틈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에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아마 이 책을 들고 얼굴에 부치면 아무래도 너무 미미한 바람이 불어오겠지…….

 

 

그런가 하면 통째로 구멍이 난 책이 있다.  퍼포머이자 비평가로 활동하는 홍승택의 『Autoportrait(자화상)』(2022). 짧고 긴 말들과 그 출처로만 이루어진 이 책에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인부터 누군지 전혀 알 수 없는 이름까지 등장하는데, 가령 이런 식이다.

 

〈화요일이 왜 이렇게 많지?〉 ― 케빈 파커

〈눈이 꺼주겠지 / 저 불은〉 ― 엘리엇 스미스

〈기다려 줘!〉 ― 스칼릿 조핸슨

〈내가 그 사람보다 못한 게 뭐야?〉 ― 김대중

〈세계는 감옥 같다 / 하지만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 레몽 루셀

〈……이게 제가 찾던 형식이에요 / 저는 더 이상 / 물러서지 않아요〉 ― 쥐스킨트

 

책을 만든 출판사 랑Lang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Autoportrait』는 유명인들, 그리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작가의 친구들의 명언과 같은 짧은 말을 모은 책이다. 처칠, 뒤샹, 나오미 와츠와 같은 유명인들의 짧은 말이 운문의 형태로 실려 있는데 책에는 인용 표시가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역사적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허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냥 허구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은, 뒤샹의 〈피곤해〉나 피카소의 〈내가 다 봤어, 너 이제 죽었어〉와 같은 평범한 짧은 말들은 그들이 삶 속에서 내뱉은 적이 없다고 확신할 수 없는 종류의 말들이기 때문이다. 

 

 

 

했을 리 없을 것 같은 말을 했다고 우기는 당당함도 이 책이 주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이처럼 짧고 평범한 말들, 한편으로 가볍고 아무것도 아닌* 진지한 말들의 이어짐 그 자체다. 이 말들은 어쩌면 했거나 언젠가 하게 될 말들과도 닮아 있다.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겠지, 이런 말을 언젠가 했겠지, 결코 이런 말을 할 리는 없겠지……. 그러나 이렇게도 해볼 수 있겠지. 이 책을 넘기다 보면 말들에 층 하나가 더 얹어지는 느낌, 먼 곳에 있는 누군가의 말을 한 겹의 두께를 얹어 반복한다는 느낌, 말과 말 들이 겹쳐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방식으로 말들이 이어지고 만들어지는 통로를 보게 된다. 어쩐지 이 가볍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바보처럼 자꾸 중얼거리게 되는데, 왠지 영원히 되뇔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는 때로 길을 걷다 마주치는 간판들이 말을 거는 방식처럼, 우연한 지시나 지표가 되기도 하며, 내 안에서 겹치는 목소리로 울리게 된다. 〈어떤 사람이 나는 불쌍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마음이 아파요.〉 〈백년이 지나가는구나.〉 〈파니니나 먹어.〉 〈가로등이 켜지기 전에 돌아올게요.〉 이 말들은 내게 겹겹이 쌓이며 사이사이 빈 공간을 만들어 준다. 레몽 크노 시집의 가느다랗게 갈라진 지면처럼, 여러 갈래의 목소리가 만들어지고, 이런 방식으로도 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구멍 뒷면에 치즈케이크 사진을 넣어 봄. 이런 식으로 활용 가능. 책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이런 틈새들은 무얼 할까? 이 구멍은 뒷면에 눈을 비춰 볼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사진을 넣으면 액자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의 말들이 일상의 말들에 기묘한 틈새를 만드는 것처럼, 이 한 권의 책은 어딘가 조금 이상하고 재미있는 구멍으로 내 안에 자리 잡는다. 그럼 나는 이것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휘휘 돌리고 싶고, 우스꽝스러운 사진을 뒷면에 집어넣고 싶고, 그렇게 해서 누군가를 조금 웃기고 싶은 기분이 든다. 말이 되거나 말거나 이야기들을 잇고 덧대 보면서. 거짓말인데, 거짓말이 아니야, 아니게 될걸? 하면서.

 

자화상에 구멍을 낸 것은 재미있는 결정이다. 스스로를 반영한 것에 구멍을 낸 그 결정들을 생각하면, 나는 언젠가 무대 위에서 펼쳐진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강상헌과 정윤영이 지난 5월 신촌 극장에서 올린 연극 「막간 수치」의 얼굴들.

 

 

윤영이 직접 그린 포스터.       


연극 「막간 수치」는 〈끝의 끝에서도 도망갈 곳이 있군요. 그곳에서 벌어지는 막간극입니다〉 라고 소개된다. 막과 막 사이를 뜻하는 〈막간〉에서 펼쳐지는 이 극은 〈이름에서부터도 자기 자신이지 못한 자〉인 야곱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태초의 부정(不正)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장 내밀하고 사적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드러나기 어려운 〈수치〉의 영역으로 다가간다.

〈불결한〉, 영원히 부모로부터 부정당한, 영원히 인정받을 수 없는 자식으로 태어나 이름으로부터도, 그 자신으로부터도 거절당하며 수치를 물려받은 극 중 인물들은 내내 거절과 부정의 기억이 만드는 세밀하고 구체적인 트라우마를, 서로의 어머니가 되어 기억들을 주고받으며 장면들을 이어 나간다. 때로 그들은 서로의 발목에 묶인 방울 달린 리본을 쫓으며 방울 소리를 내기도 하고, 길고 날카로운 나뭇가지로 서로를 교육하거나, 그것으로 말들을 받아쓰거나, 긁거나, 찌르거나, 가지 끝으로 얼굴을 부드럽게 만진다. 극은 끝없이 기억과 기억 사이에 자리한 상처들을 가로지른다. 그들은 때로 도망치고, 밀어내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무언가를 끝없이 떼어 내기도 한다. 극 중 윤영은 빵을 씹다 뱉어 그것을 조물조물 뭉쳐서 바닥에 세워 놓는다. 이 조각들처럼 무르고, 냄새나는 기억들을, 하나씩 늘어놓는 이들은 자신에게 난 구멍을 보고, 동시에 자기 자신이 짓는 이야기에 구멍을 내며 벌려 놓고 뛰어다니며 넘나든다. 만드는 이야기로부터 멀어지고, 떼어 놓으며, 도망가고, 그러나 다시 겨누고, 맞닿고, 다가가는 수많은 몸짓이 극 안으로 섞여 든다.

그중에서도 윤영의 한 얼굴과 자세가 특별히 떠오른다. 극 중 윤영은 자신의 앞에 석고로 만든 단단한 김치 통들을 탑처럼 쌓는다. 기억 속 집 안에 들어온 어머니는 윤영에게 말한다. 〈너 누구야? 너 누군데 내가 만든 김치를 먹고 있어? 너 나가서 살던 대로 계속 그렇게 살아.〉 그리고 불현듯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온다. 윤영은 그 단단한 김치 통 앞에서 팔을 위로 곧게 뻗는 자세를 취한다. 마치 몸 전체를 무기로 만들어 버린 것처럼. 팔을 높이 쳐들고, 어딘가로 내리꽂을 것 같은 그 자세는 물에 뛰어들기 전 몸을 보호하는 수영 자세를 연습하는 몸짓으로 이어진다. 그는 자꾸만 물에 머리나 배부터 떨어져 아픔을 느끼곤 했다. 뛰어들기 전에 두려워져서 그만 꼿꼿해졌다. 무언가를 가를 것처럼 단단한 얼굴은 잇몸에 너무 힘이 들어간 나머지 딱딱해진 얼굴로 뒤바뀌곤 했다. 잘못과 고통이 반복되는 때, 극 중 윤영에게는 단단함과 무름, 어떤 결연함과 무너짐, 가까움과 멀어짐이 한데 있다. 달려가는 자세는 도망가는 자세와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무언가를 찌를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러나 움츠러듦이 한 몸에 있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어딘가로 내리꽂힐 것 같은, 그러나 고통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긴장이 섞인 그 얼굴과 자세는 막간에서도 도망칠 곳을 찾던 이가 맞닥뜨린 곳, 그러니까 말이 되기 어려운, 상처가 만들어지는 곳의 이야기들이며, 여전히 봉합되지 않은 벌어진 자리들, 수많은 막간들을 다시 펼쳐 놓는다. 나는 무대 너머를 보던 친구의 얼굴에서 어떤 틈새가 열렸다고 생각했다.**

연극 무대 위에서 펼쳐진 친구의 얼굴, 그것은 친구의 얼굴이면서 그의 얼굴이 아닌 얼굴, 얼굴 너머의 어떤 얼굴이다. 나는 눈앞에 있는 채로 빠져나가는 친구의 얼굴에서 틈새와 바람을 느끼게 된다. 친구의 얼굴에서 돌연 모르는 순간이 불쑥 솟아오르는 때 생각했다. 나는 왜 너의 얼굴을 안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니까 나는 계속해서 생기게 될 빈 곳을 목도하고 싶었다. 줄곧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친구 준형은 윤영에게 미래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상상력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미래가 언제나 기대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모른다는 것, 확정되지 않는다는 것, 결정되지 않은 영역은 미래의 시제로 결합되어 이따금 친구의 얼굴로 나타난다. 친구의 얼굴로부터 나는 천천히 이후의 시간을 그려 보게 된다. 친구의 지금 얼굴, 다음 얼굴, 너머의 모르는 얼굴은 한곳에 있다. 여기 있고 천천히 흔들리고 있다. 보고 있으면, 그것이 어딘가 멀리로 데려가 줄 것 같다. 갈라진 지면처럼, 친구의 얼굴처럼,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것들을 놓아두고 미미한 바람이 얼굴에 닿는 것을 상상한다. 그러면 아주 가볍고 아무것도 아닌 말들을 이어 보며 이후의 시간을 헤아리고 싶기도, 구멍의 뒷면으로 터무니없는 치즈케이크 이미지를 밀어 넣어 그만 누군가를 웃겨 주고 싶은 기분이 들고 만다.

 

* 김유림 작가 『단어 극장』의 「작가의 말」 속, 친구 홍승택에 관한 언급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 같은 책, 「재활용」 속, 〈때때로 아는 얼굴에서 틈이 떠오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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